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니콜라 다부 (문단 편집) ===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 욘(Yonne) 주의 아노(Annoux)에서 장 프랑수아 다부(1739~1779)의 아들로 태어난 다부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가문 출신답게 브리엔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기병]]연대로 배속되었고, 1788년에 입대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귀족 출신임에도 혁명을 지지'''[* 이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위가 '''정규 사관'''에 '''귀족'''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했으며, 같은 [[연대(군대)|연대]] 안에 있던 동료들과는 반목했다. 이 때문에 다부는 군적을 말소당하고 투옥당했으며, 그대로 인생이 끝나나 싶었는데 마침 정권이 바뀌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고, 다시 군적을 회복하여 복무할 수 있었다. 1792년에는 지원병 군단을 지휘하여 플랑드르 전역에 참가, 각지를 전전하다가 1793년 3월에서 벌어진 네에르빈덴 전투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여 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직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발동된 '''"귀족사관추방령"'''에 의거해 '''파면(...)'''당하고, 그동안 활약했던 활약상도 죄다 스크랩당했다(...). 그 후 약 1년간을 고향 아노에서 군사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지인의 도움으로 다시 복직하는 데 성공하고,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드제]] 장군 휘하에 들어가게 되고 드제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에 드제 장군의 부하로서 6년간 라인 전역과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다. 한편 드제의 소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만나게 되는데, 다부가 나폴레옹에게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나폴레옹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1800년 6월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에서 다부는 친구이자 전 상관이었던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드제]]를 잃었다. 드제 사후 나폴레옹의 측근으로서 행동하게 되었고 1801년에는 친구 르클레르 장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800년의 마렝고 전투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부대를 지휘한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전투 후 사단장으로 승진,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으로부터 집정 근위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독일.폴란드 원정]] 당시 프랑스 대육군 제3군단을 맡았고,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이때 병사들을 48시간 강행군을 시켜놓은 뒤에 이어진 공세를 끝까지 버텨냄으로써 승리에 공헌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는 '''거의 2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냈다.'''[* 다부의 제3군단은 28,000명이었고, 다부가 맞아 싸운 프로이센군은 '''63,000명'''이었다. 게다가 대포의 수도 너무 열세였다. 다부는 대포 45문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프로이센군은 '''230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투 초기 프로이센 지휘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눈에 총상을 입어 전선에서 이탈해버렸고 이와 함께 최전방을 지휘하던 슈메타우(Friedrich Wilhelm Carl von Schmettau) 장군도 프랑스군의 총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프랑스군과 달리 경직되있던 프로이센의 체계는 혼란에 휩싸였고 예비 병력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뒤를 이어받은 빌헬름 3세는 완강하게 버티는 다부를 보고 나폴레옹의 본대라고 착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후퇴해버렸고, 오히려 다부가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1만 명의 사상자와 3000명의 포로를 냈는데,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70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예나 전투에서 격파한 프로이센군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나 아우어슈테트에 있던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에 의해 놀랐고, 다부는 나폴레옹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듣고는 "그가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했다. 왜냐면 다부가 [[근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다부 혼자서 아무런 지원없이 프로이센 본대를 격파해버린 것을 처음에는 완전히 못 믿었지만 전투 후 상황이 더욱 확실해지자 다부를 굉장히 칭찬했다.] "내 사촌이여, 자네의 빛나는 무훈에 대해 진심어린 찬사를 보내네. 자네가 잃은 용감한 병사들을 애도하지만, 그들이 영광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자네 군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내가 크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그들은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하네. 자네의 소식을 더 보내주고, 자네 군단을 나움부르크에서 휴식시키게."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가장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는 영예도 누렸다.[* 훗날 역사가들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이렇게 평한다. "나폴레옹은 예나에서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를 이겼고 다부는 아우어슈테트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다."]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레옹이 다부의 승리를 치하하자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절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 주시는 그것만으로 저는 족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원수가 되고 공작이 된 [[칼 14세 요한|원수1호]]가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고로 베르나도트도 다부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했었다. 베르나도트는 다부를 원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했다(...). 심지어 아우어슈테트와는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이 일로 인해 다부와 사이가 매우 틀어지게 된다. 그래도 사실 베르나도트도 나폴레옹 전에는 나름 인기있는 장군이었는데...][* 사실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전부터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는 베르나도트가 아우어슈테트에서 다부를 지원하지 않은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었는데, 둘 다 원래 혁명 지지파 출신으로 나폴레옹과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다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의 남편의 여동생의 남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형의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나, 다부가 나폴레옹 지지파인 반면, 베르나도트는 반대파였고, 나폴레옹은 집권과정에서 다부를 통해 베르나도트를 견제했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다부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있어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언했는데, 이 때문에 나폴레옹과 사이가 껄끄럽던 베르나도트는 예나로 가야 잘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그 후 맺어진 [[틸지트 조약]]으로 만들어진 [[바르샤바 공국]]의 군정관이 되었고, 1807년에는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Davout_in_chudov.jpg]] 모스크바 추도프 수도원에서 동료와 담화를 나누고 있는 다부. 거기에 더해서 1809년 에크뮐 전투와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809년에 그동안 노고한 공으로 에크뮐 대공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